목록일단쓰고봅니다/직장인일기 (31)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카페 오픈 시간에 맞춰 가고 싶었는데 조금 늦잠을 자버리는 바람에 1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좋아하는 구석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고 나는 별 수 없이 그 옆의 옆자리에 앉았다. 15분 차이로 놓친 자리의 아쉬움이 컸지만 할 일들을 풀어놓고 노트북 세팅을 마쳤더니 또 금세 새로운 자리에 적응했다. 내가 앉은, 벽에 일렬로 붙은 자리 말고도 여기저기 테이블과 의자가 많은 카페였다. 그런데 내 뒤로 따라 들어온 한 중년 여성이 내 바로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두는 걸 보고 조금 놀랐다. 아침 시간이라 사람도 없고 보통 이 정도로 자리 선택권의 폭이 넓은 상황이면 타인과 거리를 둔 자리를 고를 텐데 굳이 바로 옆을. 벽에 붙은 자리는 테이블도 다닥다닥 붙어 있어 양옆으로 왔다갔다하는 것도 불편한데 ..
1. 비가 아주아주 많이 내리는데 친구가 노트북을 들고 커피숍에 간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내가 좋아하는 그림이 그려지면서 친구가 몹시 부러워졌다. 어둑어둑하고 비내리는 바깥 경치를 보면서 노트북하는 거 정말 행복한데! 나도 따라하고 싶지만 오늘은 그럴 만한 여력이 없어 다른 방법의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퇴근하자마자 집에 가서 창문 블라인드를 쭉 올려놓고 엊그제 먹다 남은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주구장창 애니메이션을 볼 테다. 2. 대놓고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닌데 고래등 싸움에 낀 새우의 심정으로 여덟 시간을 견딘 하루였다. 남의 시선을 신경쓰지 말고 내 자신의 생각과 선택에 집중하자고 자기최면을 걸어봐도 끝까지 안 먹힐 때가 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었던 것 같다. 주변 눈치를 살피며..
퇴근 후 한강공원에서 바람을 쐬고 가자는 K의 권유가 고마우면서도 선뜻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오늘까지 해치워야 하는 저녁 반찬이 있고 저녁 후 먹는 약도 따로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K에게 내일이 괜찮을 것 같다고 우물우물 말했다. 내일은 갈 수 있어요. 좀 더 자신감을 싣고 한 번 더 말했더니 K가 흔쾌히 수락했다. 한강공원에서 가볍게 읽을 책을 가져오래서 나는 정말 책만 달랑 한 권 챙겼는데 돗자리까지 준비해온 K를 보고 조금 놀랐다. 한강공원은 처음 가본다는 내 말에 K가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적하고, 자연에 둘러쌓인 느낌이 참 좋고 한강도 예쁘고- K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점점 나도 마음이 설렜다. 걸어가..
점심을 먹고 특별한 일이 없으면 회사 한 바퀴를 빙 둘러 걸어오는 산책을 한다. 길을 따라 쭉 이어진 나무 그늘 밑으로 다니며 꽃과 풀을 보는데 요즘은 하늘까지 무척 맑아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짧은 시간이지만 회사에서 잠시나마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이 늘 감사하다. 좋은 날씨가 좋긴 한데 오늘은 햇빛이 좀 뜨겁다. 양팔을 들었다내렸다하며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을 막고 걷다보니 우수수 떨어져 있는 살굿빛 열매가 보였다. 근처 나무 팻말을 살펴보니 진짜 살구가 맞다. 매실처럼 작은 사이즈의 살구들이 올망졸망 모여 있다. 먹을 수 있는 건가. 하나 집어볼까 싶어 가까이 다가가는데 큰 종이상자를 든 아주머니 한 분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아주머니는 살구 뭉치 옆에 상자를 내려놓고 말없이..
얼마 전 친구의 SNS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은 결혼'이라는 글귀를 봤다. 보통 주변에서 듣는 결혼에 대한 인식과 많이 다른(?) 내용에 궁금증과 부러움이 동시에 일었다. 도대체 결혼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길래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까. 솔직히 궁금증보다 부러움이 더 컸다. 짧지만 강력한 그 문장은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가끔씩 불쑥 솟아오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결혼은 할 수도 있는 거고 안 할 수도 있는 거고, 한다고 반드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요즘은 욜로, 마이웨이, 혼자 사는 세상인데-' 라며 결혼이라는 제도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냉정한 제3자가 되려고 애쓰다가도 '그런데 난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 라는 엉뚱한 상상으로 빠져버린다. 겪어보지 못 한 저쪽 세계에 대한 환상이 마음..
일교차가 심한 하루하루마다 어떤 계절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아리송하다. 집에서는 아침저녁으로 전기장판을 틀고 극세사 잠옷을 입는데 외출할 때는 왠지 가벼운 옷차림을 해야할 것 같고. 그렇게 날씨 눈치를 보며 후드티 한 장, 맨투맨 한 장 입고 나간 요 며칠은 정말 추워서 혼났다. 별일 없으면 매일 들리는 도서관도 공기가 상당히 차갑다. 노트북 자판을 두드릴 때면 손 끝이 시렵다. 그래도 아침나절을 도서관에서 버티고 점심 때쯤 나오면 바깥 햇살이 퍽 따뜻해서 돌아가는 길이 즐겁다. 흐린 날씨 때문에 햇빛을 못 본지 며칠 되긴 했지만 조금 더 날이 풀리면 어디보다도 좋은 우리집 앞 산책길을 걸어야겠다.ㅡ여기까지 4월 17일에 써뒀는데, 6일이 지난 지금 날씨는 어느 정도 균형을 찾아가는 것 같다. 다만 ..
낮에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점심을 먹는데 친구가 말했다. 인터넷에서 본 사건사고들이 정말 남의 일이 아니라는 걸 갈수록 실감한다고, 이번 내 사고 이야기를 듣고 더욱 그렇게 생각하게 됐다고. 나는 나도 그렇다고 말했다. 이제는 누군가의 사고나 투병기를 가볍게 흘려들을 수 없다. 겪어봤기 때문이다. 4월 16일, 특별히 한 일은 없지만 추모의 의미로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었다. 늦은 밤 읽고 잤더니 아침에 눈이 퉁퉁 부었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도 이렇게 울었었나.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내 상황과 심리상태까지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더 감정이입이 된 것 같다. 아주 많이 슬프고 아팠다.
휴직일기에 간절히 썼던 엄마와 벚꽃보기, 며칠 전에 소원 성취했다. 엄마는 벚꽃길이 예쁘다며 무척 좋아했고 나는 카메라 앵글에 엄마와 벚꽃을 열심히 담았다. 산책을 하는데 몇번이고 강한 바람이 불며 벚꽃잎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엄마가 오기 전에는 조금이라도 바람이 불면 조마조마해하며 꽃잎이 무사하기를 바랐는데 이제는 마음 편히 흩날리는 꽃비를 감상할 수 있다. 엄마랑 함께한 순간까지 버텨준 벚꽃에게 고맙다.
지하철 시간표를 외우고 있고 그 지하철을 언제 타야 지옥철을 피할 수 있는지 훤히 꿰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 괴로운 일이다. 멈춰서 사진도 찍고 싶고 낯선 동네를 느긋이 둘러보며 보물같은 장소들을 찾아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5분 안에 오는 지하철을 타지 않으면 그 후 무시무시한 퇴근길 지옥철에 압사당하며 돌아가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걸음속도를 쉽게 늦출 수 없다. 지옥철 피하는 게 뭣이 중허다고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놓치며 살아가나. 마음속에서 두 자아가 싸운다. 그래도 나름 타협안(?)으로 하는 행동이 일단 걷다가 담고 싶은 풍경이 나오면 3초정도 멈춰서 얼른 찍고 다시 빠르게 걷는 것. 간밤의 비바람에 벚꽃이 다 져버리나 싶었는데 이럭저럭 풍성하게 남아 있어 눈이 행복했고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