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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기 D+3

김연어의하루 2018. 7. 30. 22:49

*먹은 것

아침: 케일+사과, 크리스피크림 글레이즈드 도넛
점심: 밥, 김치볶음, 멸치볶음, 김

저녁: 짜장면, 스타벅스 아이스커피, 푸로레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

 

**간 곳

광주
할머니 집
스타벅스
푸로레커피

 

 

 

 

 

***2018년 7월 29일 일요일

 

 

1. 늦잠은 죄악이다

 

  아주 아주 나태하다. 일주일 전에 여섯 시 삼십 분 발 KTX 힘내라 청춘 티켓을 예약했고 그걸 타려면 집에서 다섯 시 삼십 분에는 나가야 하는데 다섯 시 삼십 분에 일어났다. 아무 행동 하지 않고 일어난 그대로 뛰어 나가도 열차를 놓칠 시간이었다. 아깝지만 표를 취소하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일요일 새벽 열차표를 예매해둔 것은 저번 주까지만 해도 월요일에 출근하는 직장인 신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는데. 사실상 월요일 낮에 여유롭게 내려가도 되는 상황인데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가족들은 나의 실직 사실을 모르기에 아직까지는 연기가 필요했다. 어제 미리 갈아둔 케일사과주스를 마시며 곰곰이 생각했다. 버스를 타고 갈까, 열차를 타고 갈까. 내가 아직 직장인이라면? 돈을 주고 시간을 샀을 것이다. 직장인 입장에 감정 이입을 성공하고 바로 일곱 시 사십분 발 KTX 열차를 다시 예매했다. 물론 힘내라 청춘 티켓은 없었다.

 

 

2. 용산역 KTX

 

 이 블로그의 다른 카테고리인 [영수증에 대하여]에서도 한 얘기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내가 이렇게 KTX를 많이 타게 될 줄은, 신명나게 용산역을 들락날락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용산역은 내게 있어 아픈 손가락이고 극복해야 할 산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방문 횟수가 늘어가면서 용산역에 대한 괴로운 추억이 조금씩 덧칠되고 있어 그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저번 달 수요일 아침 여섯 시 삼십 분 열차를 타고 내려갈 때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가 사정없이 쏟아지는 햇빛 테러에 고생했던 기억이 나서 이번에는 왼쪽 자리로 예매를 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항상 앉던 오른쪽 자리는 적당한 그늘이 내려앉아 바깥 구경하기에도 좋고 안락해 보이는데, 내가 앉은 왼쪽 자리는 출발하는 순간부터 광주송정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뜨거운 햇빛이 블라인드를 관통해서 들어온다. 어지간히도 자리 운이 없다. 출발하기 전 가방에서 넷북을 꺼내다가 시원하게 열차 바닥으로 한 바퀴 굴려준 건 보너스.

 

 이런저런 불운(?)이 있긴 했지만 역시 열차는 참 편하다. 서울에서 광주까지의 이동 시간, 광주에서 우리 집까지의 이동 시간, 버스 기다리는 시간 등을 모두 합쳐서 정확히 세 시간이 걸렸다. 아직 셔터가 내려진 가게가 더 많은 시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3. 광주에 오래 있을 수 없는 이유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는 폭염 속에서 안대를 한 엄마를 보니 반갑다가도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엄마를 보면 대번에 ‘나 짤렸어’ 라고 말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네 글자 짜리 짧은 문장이 입 안에서 맴돌다가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더운데 뭐 하러 와서 고생이냐며 나보다 더 나의 월요일 출근을 걱정하는 엄마 모습을 보고 이건 내가 쉽게 말할 수 없는 사항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또 나태해진다. 푹 퍼진 부산 어묵처럼 거실 맨바닥에 벌렁 드러누워 안대를 한 엄마가 챙겨주는 점심과 딸기바나나 스무디와 빵을 받아 먹었다. 아,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설거지라도 내가 해야 하는데. 마음 속으로는 수도 없이 나의 게으름에 손가락질 했지만 정작 행동에 옮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다만 점점 더 나태해지면서, 글쓰기도 귀찮고 이대로 계속 집에만 누워있고 싶다는 생각까지 뻗어갔다.

 

 

4. 할머니 집


 티비에서 해주는 ‘인크레더블1’ 영화를 보다가 깜빡 졸았다. 엄마도 잠들었다고 한다. 오후 네 시쯤 일어나 아까 먹다 남은 빵을 먹고 엄마랑 같이 할머니 집에 갔다. 할머니 집에는 1등급짜리 최신형 에어컨이 있다. 오랜만에 할머니도 뵙고 피서도 할 겸 나선 길이었는데 엄마는 활짝 열린 창문들과 전원이 꺼진 에어컨을 보고 실망했다. 할머니는 오늘 바람이 많이 불어 하나도 안 덥다며 좋아하셨다. 할머니 집은 할아버지가 없는 걸 빼면 그대로였다. 할아버지 방에 마련된 작은 제단에 인사를 드렸다. 육군 헌병이었던 할아버지가 받은 수많은 훈장과 명찰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는데 훈장보다도 명찰에 새겨진 할아버지 이름 세 글자를 보니 또 눈물이 찬다.


 가족들 아무도 내 사정을 모르니 당연하게도 직장에 대한 이야기가 오고갔다. 회사 다니기 힘들지는 않느냐, 내일 몇 시에 출근하느냐, 여름 휴가는 없느냐.. 다니지 않으니 힘들지 않고, 내일 출근은 안 하고, 당분간 매일 매일이 휴가라는 말 따위는 물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힘들지만 괜찮다, 내일 오후 출근이고 여름 휴가는 중순쯤이다 라고 성실하게 진술했다. 워낙 이런 거짓말을 못 하는지라 들키면 어떡하나 전전긍긍했는데 한번 뱉고 나니 의외로 술술 말이 잘 나온다. 8월까지는 월급이 나오니 좀 더 연기가 잘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5. 카페, 커피

 

 할머니가 저녁으로 짜장면을 사줬다. 더운 바람을 맞으며 뜨거운 짜장면을 먹고, 뒷정리를 한 다음 엄마랑 나는 할머니 집을 나섰다. 이대로 덥고 끈적끈적한 상태로 집에 가기 싫어서 엄마한테 스타벅스로 피서가자고 슬쩍 제안했다. 엄마는 멀어서 싫다 했지만 나는 스타벅스 카드에 잔액이 있으니 꼭 거기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며 엄마를 이끌었다. 말하진 않았지만 저번에 엄마가 스타벅스 토마토 주스를 맛있게 마시던 기억이 떠올라 주장한 이유도 있었다.


 당연하다는 듯 스타벅스를 선택하는 이유는 어딜 가든 일정한 환경이 주는 안정감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느 지역의 어느 지점을 가더라도 항상 적당히 쾌적하고, 와이파이가 있고, 비슷한 자리가 있다. 혼자 갈 때는 주로 바 형식의 자리에 앉아 노트북 작업을 하고 동행자가 있을 때는 구석진 자리나 2층 이상으로 올라가 오래 오래 눌러앉는 편이다. 엄마가 있을 때는 의자가 편한 자리를 찾는다.

 

 시큰둥하게 카페 피서를 따라온 엄마도 막상 들어오니 시원하다고 좋아했다. 푹신한 의자가 있는 자리까지 선점하면서 보다 완벽해졌다. 엄마가 마실 딸기주스와 내가 마실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깔끔하고 진한 카페인이 필요할 때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보다 아이스 커피가 제격이다. 음료가 나오고 자리까지 편하니 끝없는 수다가 이어진다. 시원한 공간에서 좋아하는 음료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 이건 친구끼리나 해야 재미있는 행위인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엄마랑 이렇게 노는 게 더 즐겁다. 하지만 오늘은 아쉽게도 여덟 시 드라마를 봐야 하는 엄마의 스케줄(?) 때문에 여덟 시 오 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깥 바람은 아까보다 많이 선선해졌다. 엄마는 드라마를 보고 나는 막간을 이용해 밤 약속을 잡았다. 친한 언니와 커피 한잔 하는 시간 또한 놓칠 수 없지.

 

 열 시 마감하는 카페에서 시간에 쫓겨가며 허겁지겁 이야기를 나누고, 걸어가는 길에 그리고 버스를 기다리며 또 이야기를 나눴다. 삶에 대한 고민은 사람마다 형태만 다를 뿐 본질은 비슷한 것 같다. 우리는 다른 갈래의 길을 걷고 있지만 도착점에서 다시 만나 어떻게 해야 잘 먹고 살지 끊임없이 생각한다. 삶이 너무 쉽게 풀려도 이상하겠지만,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우리 앞에 나타나는 삶이 이 이상 꼬이지 않기만을 바란다.

 

 

5. 다음을 기약해야 할 시점


 일단 이번에 실직 사실을 고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인정하고, 8월에 엄마가 서울로 와서 조금 길게 머무를 때 이야기하는 걸로 내 자신과 합의했다.

 밤에 샤워하고 나와서 누우니 뽀송뽀송해서 기분이 좋았다. 눅눅하지 않아 감사한 밤이었다. 모로누워 엄마랑 같이 ‘시간 여행자의 아내’ 영화를 봤다. 레이첼 맥아담스는 언제봐도 사랑스럽네-하며 티비 한번 보고 핸드폰으로 인스타그램 한번 확인하며 이도저도 아닌 어설픈 멀티태스킹을 이어갔다. 내가 백수라는 사실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잔잔하고 평온한 칠월의 마지막 일요일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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