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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일기 D+15

김연어의하루 2018. 8. 11. 10:24

*먹은 것

아침: 블루베리주스, 식빵(무화과잼+땅콩버터)

점심: 밥, 광천김, 볶음김치, 오이장아찌

간식: 아이스 아메리카노, 자몽에이드

저녁: 무화과 생크치

 

**간 곳

소울브레드

카페 잇샤

관객의취향

 

 

 

 

 

***2018년 8월 10일 금요일

 

 

1. 나는 소비 후 우울해진다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기분이 굉장히 묘하다. 울적한 생각만 들고 목구멍까지 후회가 치솟았다. 그토록 원하던 맥북을 들여왔는데 어쩐지 쳐다보기도 싫다.

 

 

2. 긍정마인드의 유효시간

 

 정말 간만에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산뜻한 아침을 맞은 날이었다. 비록 9시 다 되서 눈을 뜬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생활리듬을 되찾겠노라 다짐하며 힘차게 글을 쓰고 집안을 정리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했다.

 

 운좋게도 적당한 가격에 원하는 스펙을 갖춘 맥북을 찾았다. 일주일 가량 중고나라에서 탐색전을 벌인 보람이 있다. 바로 직거래 약속을 잡았다. 저녁에는 관객의취향에 가서 영화를 볼 예정이고, 직거래는 퇴근 시간 즈음으로 잡혔으니 그 전에 일정을 하나 더 끼워 넣어 오후 시간대에 외출을 몰아 넣는 것으로 결정했다. '~하는 김에 하자'라는 성격이라, '직거래 장소인 역삼역으로 가는 김에 그쪽 부근에 있는 빵집도 들리자' 라는 식으로 새로운 일정을 만들어냈다. 

 

 드디어 맥북을 사는구나. 금전적인 부분에서는 이미 각오했고 OS같은 건 차차 익히면 된다. 정 어려우면 윈도우를 깔아 병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고. 게다가 난 아이폰과 아이패드가 있으니 애플 기기끼리 호환해서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새로운 전자기기를 맞이하는 것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해두었기에 이때까지만 해도 딱히 마음에 걸리는 건 없었다.

 

 

3.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총 스케줄이 세 개뿐이 없지만 각 이동 시간이 적게는 삼 십분 많게는 한 시간 걸려서 조금 여유있게 준비해서 집을 나섰다. 시뮬레이션 속 내 일정은 완벽했다. 모든 일정에는 여유시간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계획들에 퇴근길 교통정체까지는 반영하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막연히 여섯 시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도로는 다섯 시 무렵부터 미친듯이 막히기 시작했다. 내 이동 경로가 특히나 더 막히는 구간이었고 공사하는 곳도 많았다. '그쪽 부근'이라 고른 빵집은 사실 직거래 장소인 역삼과는 우리집에서 동쪽이라는 것 외의 공통점이 없는 양재에 있었고, 네이버 지도 상 한 시간 걸린다는 거리를 총 두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만원버스와 세 번의 환승에 시달리며 빵을 사왔다. 미리 예약해둔 터라 안 갈 수도 없었다.

 

 역삼으로 갈 때도 역시 만원버스와 환승을 거쳤으며, 정작 중요한 직거래 약속은 지각하는 바람에 생각만큼 여유있게 물건을 살펴보지 못했다. 카페에서 허둥지둥 충전 상태와 키보드 작동 여부 등을 확인하고 계좌이체로 돈을 건넸다. 맥북이 생겼다. 거래가 끝나니 이제 관객의취향으로 갈 시간이 되었다. 세 모금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아까웠다. 테이크아웃이라도 할까 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짐만 될 것 같아 그냥 그대로 두고 나왔다.

 

 

4. 이게 바로 현타구나

 

 한쪽 겨드랑이에 맥북을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언덕배기 위의 2호선으로 걸어갔다. 가방은 빵과 맥북 충전기가 담겨 아까보다 무게가 더해졌다. 다음 목적지인 관객의취향까지는 지하철로 삼 십분, 걸어서 십 분을 더 가야 한다. 빵이 있고 노트북이 생겼고 저번 주부터 기대한 재미있는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인데 이상하게 갈수록 기운이 빠졌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 싶었던 빵을 사왔으면 행복해야 하는데, 사고 싶던 맥북을 샀으니 기뻐야 하는데 전혀 그러질 못하고 있다. 빽빽한 가로수가 우거진 도보를 걸어가며 소비란 무엇인지 다시한번 생각했다. 아무래도 현타가 온 것 같았다. 현타는 '욕구 충족 이후에 밀려오는 무념무상의 시간'을 일컫는 신조어인 '현자타임', '현실자각타임' 등의 준말이라 한다. 내게 꼭 들어맞는 아주 정확한 묘사였다.

 

 

5. 오늘의 위로

 

 예상에서 어긋난 스케줄에 덥고, 컨디션도 좋지 않은데 횡단보도 건너편에서 환승해야 할 버스까지 쌩 지나간다. 안 될 날은 참 뭐든 안 되는구나 싶어 허탈했다. 그냥 집에 가고 싶은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던 중, 바로 뒤에 같은 번호의 버스가 신호 대기에 걸린 게 보였다. 두 대가 연속 왔었구나! 얼른 달려갔더니 기사 아저씨가 어서와요, 라는 기분좋은 인사를 건넸다. 퇴근길 정체에 힘들텐데도 구김없는 기사 아저씨의 인사가 위안이 되었다.

 

 관객의취향에는 잘 도착했다. 오늘 상영작이 인기가 많은 작품이라 사람이 많을 걸로 예상했는데 역시나 자리가 부족할 정도로 붐볐다. 자몽에이드를 한잔 시키고, 낯선 사람들 사이의 빈 자리로 몸을 구겨 넣었다. 영화는 즐거웠다. <맘마미아1>을 봤는데 특별한 내용 없이도 장면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 저절로 웃음짓게 된다. 익숙한 노래들도 영화 속에서 다시 들으니 더 좋은 것 같고. 다음 주에 집에 내려가면 엄마랑 <맘마미아2> 봐야지.

 

 

6. 맥북과 권고사직의 상관관계

 

 이제 내가 할 일은 최대한 빨리 맥북과 친해지는 것인데 이상하게 자꾸만 중고나라에 글을 올리는 내 모습이 상상된다. 맥북이 필요해서 샀는데 저랑 맞지 않은 것 같아요. 중고로 구매한지 하루만에 내놓습니다. 무슨 말을 쓸지도 술술 나오는 게 어째 현실이 될까 두렵다.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들어본 대사인데. '맞지 않다'는 말. 이 주 전 월요일 회사를 다닐 때 인사과장이 면전에서 내게 저런 대사를 읊었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맞지 않는 게 얼마나 맞지 않는 거냐고, 원래 그렇게 서로 맞춰 가며 사는 거 아니냐는 말을 마음속으로 꾹꾹 눌렀었다. 혹시 지금 내 옆의 맥북도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나. 쓰기 편하라고 나온 전자기기인데 안 맞으면 또 얼마나 안 맞는다고. 서로 맞춰가며 지내보면 어떻겠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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