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백수일기 D+12 본문
*먹은 것
아침: 사과+케일, 식빵(무화과잼+땅콩버터)
점심: 누룽지 끓이기, 오이장아찌
간식: 인덱스 시즈널 아이스커피
저녁: 베리베리 치즈케이크 피자, 브라우니 한쪽
**간 곳
킨코스
농협은행
아비드안경
인덱스
이마트 자양점
***2018년 8월 7일 화요일
1. 소소한 일상 보고
어제 새로 산 안경이 우려했던 것보다 잘 어울려서 기쁘다. 주변에서는 갑자기 무슨 안경이냐며 놀라는 반응이지만 이런 사소한 변화가 나는 즐겁다. 물론 눈 관리도 필요했고. 다만 다 좋은데, 코받침 자국 남는 것이 신경쓰여 나도 모르게 자꾸 코받침 쪽으로 손이 간다. 안경을 좀 더 올리고 콧대를 꾹꾹 누르며 자국이 남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청년우대형 청약통장도 전환하고 왔다. 서류 준비가 복잡해보여 무의식중에 미루고 있었는데 친절한 친구 B가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준 덕분에 필요 서류만 체크해서 빠르게 해결했다.
2. 지압펜을 파는 아저씨
지하철타고 건대입구역으로 가는 길, 잡상인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이 우리 칸으로 들어오더니 맞은편에 앉은 승객들 무릎 위로 전단지처럼 보이는 걸 한장씩 툭툭 내려놓는다. 내 쪽으로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이대로 저 분이 멀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아저씨는 아까 건넨 전단지들을 회수하더니 내가 앉은 라인으로 몸을 돌려 똑같이 나눠주기 시작했다.
받고보니 전단지가 아니라 불의의 사고로 장애인이 되었다는 내용과 가족사진, 스캔한 장애인 복지카드 사진이 코팅된 A4종이였다. 그리고 한 자루에 천 원이라는 지압펜 하나. 종교 행위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의심이 일었다. 진짜일까? 가짜일까? 대체 무엇이 의심스러운지 스스로도 정확히 모르면서 무조건 의심부터 하고 봤다.
그런데 사실, 뭐든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쩔 것인가.
백수가 되고나서부터 생계를 이어가는 일에 대한 무게를 하루가 다르게 실감하고 있다. 자유롭고 즐겁기 때문에 후회는 없지만 솔직히 자기 전에 누워 먼 미래를 생각하면 불안해질 때가 많다. 나 혼자 내 입만 책임지기도 버거운데 식구가 있다면, 그리고 돈을 벌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그러니 가족을 팔고 신체를 팔고 정신을 팔아 천 원 이 천원 푼돈을 그러모아야하는 심정이라면, 진짜든 가짜든 어떠랴 싶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니까, 나보다 조금 더 어려운 사람에게 조금 나누어주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마음을 너그럽게 써야한다고 다짐하면서도 지갑 속 현금이 없어 아무 것도 사지 못했다. 나는 펜 하나 바로 살 천 원짜리 한장이 없었다. 요즘 세상이 추구하는 '현금 없는 사회'가 여러 사람을 아프게 한다.
나는 7-4칸에 타고 있었다. 아저씨가 코팅된 종이와 지압펜을 수거하더니 열차가 가는 방향으로 절뚝거리는 다리를 옮겼다. 8-4칸에서부터 오신 걸까. 1-1칸까지 가시는 걸까. 현금을 꼭 가지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미안했다.
3. INDEX
인덱스에서 하루의 행복 중 절반 이상을 선물받았다. '서울에 오길 잘했어' 리스트에 등재될 정도인 인덱스는 정말 마약같은 곳이다. 볼펜 한 자루 사고 커피 한 잔 마시러 온 건데 온 김에 볼펜 몇 자루 더 쟁여야 할 것 같고 책도 사고 싶은 게 끊임없이 눈에 들어오고. 우리집에서 가는 교통편도 편리해서 더욱 완벽해.
왜 이 서점이 이렇게 끌릴까? 생각해보면 인덱스는 북 큐레이팅이 좀 남다르다. 여느 서점들처럼 가나다순 정렬이나 인문학, 에세이, 시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아닌 [음식], [생활의 방식], [커피와 차], [공부] 등 사람들 흥미를 끌 만한 주제로 나누어 배치했다. 여러 표지 색깔을 가진 시리즈물 책들은 색깔별로 정렬해두어 더 보기 좋고 예쁘다. 책 내용을 몰라도 사고 싶게 만들 정도다.
개인적으로 기성출판과 독립출판을 조화롭게 들여놓은 것도 참 좋다. 예를 들어 저번에 모 독립서점에서는 <매거진B>를 살 수 없었는데 인덱스에 오면 <매거진B>의 거의 모든 과월호까지 구할 수 있다. 기성출판이어도 트렌디한 책은 보유하고 있는 기특한 인덱스. 볼펜도 잘 만드는 인덱스. (지금 쓰는 오롤리데이 플래너와 인덱스 볼펜이 너무 찰떡궁합이다) 커피도 맛있는 인덱스. 머무는 시간동안 많이 행복했다.
4. 맞이의 자세
입추긴 입추였나 보다. 며칠 사이 밤바람에서 습기가 많이 사라지고 가을이 한 발자국 정도는 다가운 느낌이라 조금 설레인다. 끝없이 길었던 여름에도 마지막이 오는구나. 날씨를 핑계로 늘어진 나날이 많았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새 계절을 그리며 오늘보다 더 부지런해질 내일의 나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