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직장인의 일기 #10 본문
퇴근 후 한강공원에서 바람을 쐬고 가자는 K의 권유가 고마우면서도 선뜻 알겠다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우리집 냉장고에는 오늘까지 해치워야 하는 저녁 반찬이 있고 저녁 후 먹는 약도 따로 챙겨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아 K에게 내일이 괜찮을 것 같다고 우물우물 말했다. 내일은 갈 수 있어요. 좀 더 자신감을 싣고 한 번 더 말했더니 K가 흔쾌히 수락했다.
한강공원에서 가볍게 읽을 책을 가져오래서 나는 정말 책만 달랑 한 권 챙겼는데 돗자리까지 준비해온 K를 보고 조금 놀랐다. 한강공원은 처음 가본다는 내 말에 K가 들뜬 목소리로 이것저것 이야기를 들려줬다. 한적하고, 자연에 둘러쌓인 느낌이 참 좋고 한강도 예쁘고- K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점점 나도 마음이 설렜다.
걸어가는 길 여러 가게에 들러 간식거리를 샀다. 참치마요네즈맛 오니기리, 햄치즈 샌드위치, 커스타드 크림이 듬뿍 들어간 슈크림. 전부다 한강 피크닉에 잘 어울리는 간식들이다. 간식 후보에 올랐지만 아쉽게 탈락한 떡볶이와 닭강정은 다음에 더 많은 일행과 왔을 때 사는 것을 기약했다.
우리가 한강공원에 도착했을 때 나무 그늘 밑 자리는 만석이었다. 어디에 자리를 깔지 빙 둘러보다가 적당히 그늘지고 잔디가 촘촘히 깔린 곳을 찾아 돗자리를 폈다. 샌들을 벗고 폴짝 뛰어 앉으니 갑자기 무척 행복해졌다. 여기 진짜 좋아요, 너무 좋아요.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진심으로 그랬기에 자꾸 저 두 문장만 반복해서 말했다.
가방에 담아온 간식들을 꺼내 일렬횡대로 세운 다음 인증샷을 찍었다. 사진을 찍은 후에는 먹고 이야기하고 즐기는 시간이 이어졌다. 슈크림을 크게 베어 먹는데 속에 꽉 찬 커스타드 크림이 빵하고 터져 손바닥으로 줄줄 흘렀고, 오니기리를 먹을 때는 사뭇 진지한 대화가 오갔다. 시간이 너무 빨리 흘러갔다.
책을 먼저 꺼내든 건 K였다. 배를 깔고 엎드린 K 옆에 나도 따라 엎드렸다. 낮은 위치에서 보이는 세상이 남달랐다. 책을 읽으러 온 건데 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예쁜 색으로 저무는 노을, 하나 둘 켜지는 가로등, 잡기 놀이를 하는 아이와 아빠. 이런 풍경들에 시선을 빼앗기며 결국 둘다 책을 덮어버렸다.
편한 자세로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K가 땅에 등을 대고 눕는 자세로 바꿨다. 이렇게 누워서 하늘 한번 봐봐. 느낌이 완전 새롭다? 나는 또 K를 따라했다. 돗자리를 깔고 있긴 하지만 여기에서 엎드리거나 누울 생각은 없었는데 막상 해보니 생각 이상으로 좋다. 많이 어둑해진 하늘에 점처럼 콕 박힌 별 하나가 보였고 나는 K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 저어기 1시 방향에 별 있어요. 아, 정말! 우리는 별거 아닌 일에 신나하며 다른 별은 없나 열심히 찾기 시작했다.
서울 한복판에서 이렇게 자연 속에 누워 쉴 수 있다는 게 참 좋지 않아? 별 찾기를 마치고 K가 툭 던진 질문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출근해서 하루종일 일했던 아까의 시간들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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