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장승배기역에서 본문
나는 갈수록 가성비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 수요일, 목요일에만 판매한다는 서촌 취천루 군만두가 몹시 땡겨서 점심을 그걸로 할까 싶다가도 여덟개 정도의 군만두가 8천원쯤인 걸 본 순간 며칠 전 킴스클럽에서 스쳐지나간 동원 개성왕만두가 떠올랐다. 1.82kg에 9천 얼마쯤 하는 가격으로 세일 중이었는데 어림짐작해봐도 가격대비 양이 취천루보다 나은 것 같았다. 물론 장인이 직접 빚은 전통 수제만두에 냉동만두를 비할 순 없지만 지금의 나는 한방에 큰 행복을 느끼는 것보다 작은 행복을 알음알음 여러번 나눠갖는 쪽이 더 좋았다.
점심 외식은 그렇게 부결되고, 일단 목적지인 장승배기역에 도착했다. 장승배기역 빵집 투어 때 한번 와본 이후 처음이다. 그땐 집에서 잠바 하나만 걸치고 나와 꼴도 별로이고 비도 내렸는데 오늘은 날씨가 좋다. 며칠만에 미세먼지가 걷혀서 그런지 햇빛이 더 반짝반짝 빛나는 것 같다.
서울시특별교육청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려면 먼저 도서관을 한번 방문 후 정회원 등록을 마쳐야 한다고 했다. 서울시특별교육청 중 집과 가까운 곳은 없어(외려 거리상으로는 가까워도 교통이 중구난방이거나) 한 군데 한 군데 위치를 살펴보다가 동작도서관을 골랐다. 장승배기역 6번 출구에서 바로 가까운 위치가 좋았다.
지하철 출입구들이 뚝뚝 떨어져 있고 큰 도로가 십자모양으로 이어진 장승배기역.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참배하러 가면서 쉬었던 곳이다. 당시 이곳은 인가도 없고 행인도 드물어 정조가 장승을 만들어 세우라 지시했고 이후 장승배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진짜 장승도 있다.
동작도서관은 생각보다 더 6번출구에서 가까웠다. 회원등록은 3층 종합자료실에서 할 수 있다. ‘진짜 책을 읽고 싶은 사람들만 오라!!’ 라는 의도인지(설마) 은근히 계단이 많았다. 물론 엘리베이터도 있지만 어쩐지 3층이라는 층수는 엘리베이터보다 계단을 이용하는 쪽이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회원증만 얼른 만들고 근처 카페로 폭 들어가서 글도 쓰고, 스케줄도 체크하고, 천성인어도 쓸 생각이었는데-오랜만에 보는 도서관 특유의 풍경에 입이 싱글벙글해져 온 정신을 빼앗겼다. 넓은 책상에 옹기종기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벽 한켠에 일렬로 늘어진 컴퓨터,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학생, 패딩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엎드려자는 사람, 블록의자에 아빠다리로 앉아 책을 읽는 아이, 대여섯 권 쌓아놓은 책 옆에서 또다른 책을 골똘히 읽는 할머니. 아, 역시 도서관이라는 곳은 참 좋은 공간이다. 돈이 없을 때 가장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올 수 있다. 누구나 읽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흐뭇해져 견딜 수 없었다. 분위기에 취해 하마터면 책을 여러 권 빌릴 뻔 했다. 그러나 아직 읽고 있는 책들을 떠올리며 다행히 참을 수 있었다.
회원 등록을 마쳤고 이제 22개의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도서관들이 전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보니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은 손에 꼽히겠지만, 그래도 든든하다. 서울살이에 밑천 하나를 마련한 것 같아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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