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커피 한 잔 할래요 본문
예전에는 비 오는 날을 무척 싫어했다. 애써 말아놓은 앞머리가 쳐지고 운동화 앞코가 젖어 발이 축축해지는 걸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발을 샌들로 바꿔 신고 앞머리는 포기했더니(?) 순식간에 비 오는 날이 좋아졌다. 너무 손쉽게 뒤바뀐 감정이 얼떨떨하지만 아직까지는 비 오는 날을 좋아하고 있다.
오늘은 지난 주부터 예보된 봄비가 내리면서 아침부터 날이 흐렸다. 출근 준비를 마치고 이어폰을 꽂는데 평소 듣던 플레이리스트가 아닌 새로운 노래가 듣고 싶어 잠시 고민하다가 폴킴을 떠올렸다. 적당히 내리는 비와 무채색의 하늘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가사도, 음성도, 멜로디도. 나는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찾아 1곡 무한 반복을 설정한 후 집을 나섰다.
단둘이서 영활보자 할까
시시하진 않을까
어떤 얘기로 널 웃게 할까
용기가 없는 나
평소보다 10분 일찍 나왔더니 지하철도 한산해서 편하게 출근했다. 긴 지하철 입구를 빠져나오니 집에서 출발했을 때보다 좀 더 많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하늘색은 여전히 무채색이었고, 이른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출근길을 걸었다.
커피 한잔 할래요
커피 한잔 할래요
두 입술 꼭 깨물고 용기 낸 그 말
커피 한잔에 빌린 그대를 향한 나의 맘
보고 싶었단 말 하고 싶었죠
하나 둘 출근하는 직원들과 간단한 담소를 즐겼다. 다들 나처럼 날씨의 영향을 받은 듯 아침부터 철철 흘러넘치는 감성들로 가득했다(비 맞는 꽃을 보며 꽃이 멍들까 걱정된다는 어느 분의 시적 표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슬슬 업무로 돌아갈 분위기에서 갑자기 한 직원이 벌떡 일어나더니 커피를 쏘겠다고 선언했다. 다른 모든 직원들이 환호하며 각자 마시고 싶은 음료를 포스트잇에 써 내려갔다. 우리는 물었다. 왜요? 갑자기 왜 사주시는 거에요? 골든벨을 울린 직원은 끝내 커피를 사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그저 씩 웃는데, 이상하게도 그 작은 호의에 마음이 몽글몽글 촉촉해졌다. 갓 내린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을 받아들고 보니 아침에 선곡한 노래와 상황이 들어맞는 것 같아 조금 신기했다. 커피 노래를 들었더니 커피가 따라왔어.
그대도 같나요
그대 나와 같나요
그대도 조금은 내 생각했나요
오늘은 내가 그댈 더 많이 웃게 할게요
이대로 시간이 멈추길
문득 머릿속으로 몇 년 전 걔랑 산책하던 대학교 운동장이 그려졌다. 그날 우리는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아주 오랫동안 운동장을 걸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길게 나누었는지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선명한 기억은 걔가 저녁놀이 예쁘다며 연신 사진을 찍었던 순간뿐. 걔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슬쩍 문자를 보내려다가 참았다. 오늘은 그냥 나의 작은 기억 하나로 하루를 견뎌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