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D+6
*먹은 것
아침: 크림 카라멜 티, 모닝죽 단팥죽
점심: 왕돈까스
간식: 아이스 아메리카노, 초코 스콘, 치즈카라멜 마카롱
저녁: 왕돈까스 남은거
**간 곳
투썸 플레이스
성북동 왕돈까스
줄리앤줄리아
영풍문고
***2018년 8월 1일 수요일
1. 직장인 사이에서 직장인 코스프레
혼자 시트콤을 찍은 아침. 어제 우리집에서 묵은 이모는 점심께쯤 약속이 있어 나보다 한결 여유로웠다. 설정 상(?) 열 시 삼십 분에 출근해야 하는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출근 준비를 했다. 표면적으로는 화장품을 착착 바르며 이모랑 가벼운 잡담도 주고 받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이모가 가기 전까지 어디에 있을지 가장 최적의 장소를 계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 시간에 갈 만한 곳은 역시 카페 뿐이지만 예상 밖의 외출에 돈을 쓰고 싶진 않아서 역 근처 투썸 플레이스로 갔다. CJ기프트카드에 남은 돈으로 크림 카라멜 티를 마시며 오전 시간을 보냈다. 빌딩 1층에 입주한 카페라서 시끌벅적 직장인들이 엄청 왔다갔다 하는데 저마다 카페를 이용하는 목적들이 다양했다. 저쪽 테이블에서는 면접이 진행 중이고, 내 바로 옆 사각 테이블에서는 네 명의 남자가 한창 회의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직업 탐방이라도 온 건지 앳된 얼굴에 배낭을 맨 학생 무리도 들어왔다. 나같은 한량은 나밖에 없어 보인다. 점심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직장인들은 더욱 많아졌다. 한번에 대여섯 명이 몰려들어와 음료를 시키는 게 다반사였다. 그만큼 무척 시끄럽고 정신 없고 아르바이트생은 힘들어 보였다. 여기는 혼자 와서 즐기기에 썩 좋은 환경은 아닌 것 같다. 특히 나같은 백수에게는. 왜냐하면 넷북 인터넷도 잘 안 잡혔거든.
열 두 시 정도까지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깨끗하게 정리된 이부자리와 야무지게 꽉 묶인 쓰레기 봉투, 의자 위에 놓인 오만원과 스타벅스 카드 한장을 보고 "아 이모 뭐야-" 하는 목메인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나중에 이야기하니 오만원은 에어컨값이고 스타벅스 카드는 숙박비라고 한다. 고맙고 미안했다.
2. 맛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
날씨 탓인지, 오면서 본 비빔국수 집이 생각나서인지 점심은 외식을 하고 싶어졌다. 오후에는 부천에 있는 카페를 갈 생각이었기에 카페 근처에 있는 왕돈까스 집으로 갔다. 저번에 어마무시한 웨이팅을 보고 기억해둔 곳인데 오후 두 시쯤 방문했음에도 가게 내부에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혼자 먹는 건 아무렇지 않은데 웨이팅 심한 집의 4인석 자리에 앉아 먹으니 살짝 등에서 땀이 배였다. 나 떨고 있니?
돈까스가 엄청 커서 한 덩어리는 통째로 포장해왔다. 포장을 부탁하니 플라스틱 팩과 고무줄과 비닐봉지를 무심한 듯 시크하게 건네와서 좀 당황했지만, 여긴 셀프 포장인가 보다 하고 이해하며 열심히 칼질한 돈까스를 담았다.
3. 조금은 일관성 없는 남은 하루의 기록
삼 일 전부터 오고 싶었던 줄리앤줄리아 카페. 요즘 카페들처럼 감성이나 겉멋에 치중된 곳은 아니다. 사장님이 디저트 개발과 좋은 재료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떠올리면 어쩐지 기분이 좋아지는 평범한 동네 카페이다. 계속 궁금했던 치즈카라멜 마카롱과 초코스콘을 후식으로 먹었다. 노트북을 들고 오지도 않았고 그냥 정말 쉬려고 들렸다. 여기서 플랜를 좀 써볼까 했는데 아쉽게도 실패. 첫 단추를 너무 잘 꿰고 싶은 내 욕심이 커서 그렇다. 예쁜 글씨, 최적의 펜으로 실수 하나 없이 깔끔하게 플래너를 써 내려가고 싶은 이상한 집착.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플래너 꾸미기용으로 산 마스킹 테이프는 덕지덕지 찢었다가 붙였다가 하며 낭비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즐거웠다. 난 원래 이런 걸 잘 못 하는 인간이다.
줄리앤줄리아에서 잘 쉬다가 퇴근 지옥철이 되기 전에 얼른 집 쪽으로 넘어왔다. 퇴사 후 전자도서관으로 책읽는 횟수가 너무 줄어서, 영풍문고에 앉아서 전자책을 좀 읽다 왔다. 공짜인데 시원하고, 심지어 와이파이도 잘 잡히지 않아 독서를 하기에 정말 안성맞춤이다. 지금 읽고 있는 책 제목은 <휘게 라이프>. 읽다보니 덴마크에 가고 싶어졌다.
8월의 첫날이라 또 마음가짐이 새로워지고, 계획성 있는 백수 라이프에 슬슬 시동을 넣고 있다. 그나저나 보통 에어컨을 끄고도 1시간은 시원한데 오늘은 끄고 나니 바로 더워진다. 자정이 넘은 시간인데 밖에서 매미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