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D+5
*먹은 것
아침: 미숫가루 두 스푼+꿀 두 스푼+우유 200ml, 모닝롤 2개(토마토잼과 땅콩버터)
점심: 밥, 광천김
저녁: 치마살 고기, 육회, 비빔밥
**간 곳
알라딘 중고서점 연신내점
망원시장
다이소
영풍문고
철산 촌놈집
***2018년 7월 31일 화요일
1. 칠 월의 마지막 날
날도 덥고 눈도 늦게 뜬, 화요일의 시작. 창문을 열었더니 오랜만에 시원한 바람이 살랑하고 불어와서 반가웠다. 오늘은 왠지 과일보다 미숫가루가 끌려서 꿀과 미숫가루와 우유를 넣고 갈았다. 저번 광주행에서 할머니가 챙겨 준 토마토잼도 개시했다. 토마토와 잼이라니. 먹으면서도 매칭이 안 되서 혼자 어색했지만 땅콩버터와 발라서 먹으니 큰 위화감 없이 넘길 수 있었다.
하늘이 파랗다. 시원한 실내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귀한 선물이고 기쁨이다.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잠시 글을 쓰다가 문득 알라딘 중고서점이 생각났다. 사고 싶은 책이 생기면 하루 걸러 틈틈이 중고서점을 확인한다. 특히 절판된 책이면 더욱 자주 습관처럼 검색해보는데 세상에! 책이 있다. 깜짝 놀라 매장 위치를 살펴보니 연신내였다. 집에서 한 시간 거리, 두 번의 환승과 세 번의 지하철을 타야 하지만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다. 원하는 걸 얻으러 가야 할 때 환승이 많다던가 거리가 멀다던가 하는 약간의 애로사항이 발생할 때면 난 이렇게 생각한다. 광주에서 출발하는 것 보다는 낫잖아?
2. 카메라를 안 들고 나올 거면 양산이라도 챙기던가
아. 바깥에서 보는 하늘은, 조금 원망스럽다. 미친듯이 뜨겁고 축축하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책을 사러 간다는 순수한 목적 하나로 많은 것이 누그러지는 것 같다. 그래도 양산을 깜빡한 건 집에 돌아올 때까지 후회되었다.
빠른 환승하는 플랫폼 번호를 외워두고, 도보 이동 경로도 꼼꼼히 체크해서 한 시간 칠 분만에 연신내점에 도착했다. 미리 점찍어둔 책을 사는 건 오 분도 걸리지 않았다. 우와 행복해. 라는 말이 육성으로 절로 나왔다.
여기까지는 나름대로 참 좋은 일정이었는데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했다. 덥지만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망원동에 들리고 싶어졌다. 망원동 가면 으레 들리는 빵집도 생각나고, 잡화점도 생각나고.. 가고 싶은 곳은 많은데 이 더위에 무거운 책을 짊어지고 망원동 골목을 걸어다닐 자신이 없었다. 고르고 골라 그냥 오늘은 망원시장 돈까스만 사서 얼른 집으로 복귀하는 걸로 정했다. 한 장에 천 원 하는, 가성비 괜찮은 돈까스집이 있다. 중간에 내리기 때문에 지하철 요금도 한번 더 내야 하지만 맛있는 돈까스랑 먹는 점심을 기대하며 모든 게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네이버 지도에 의하면 망원역 2번 출구에서 삼 백 미터 정도 걸어가면 돈까스집이 나온다고 한다. 별로 멀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니 눈앞이 핑핑 돈다. 네이버 지도가 알려준 길은 그늘이 인색했다. 오른쪽 왼쪽 어느 쪽으로 걸어도 얼굴이 타들어갈 듯한 햇빛에 노출된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걸었다. 고생이 동반되니 달콤한 열매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커져 갔다. 그렇게 삼 백 미터를 걸었는데 돈까스집 불은 꺼져 있었고 매주 화요일 정기 휴무라고 적힌 덮개를 보았다.
내가 미리 확인 못 한 휴무인데 솔직히 많이 허탈해서 집에 와서도 멍하니 갈피를 못 잡았다. 점심을 뭐 먹을지, 남은 시간 동안 뭘 해야 하는지, 덥고 짜증나고 속상했다. 알차고 계획적인 백수 라이프에 연한 실금이 간 기분이었다.
3. 직장인 퍼포먼스
일단 돈까스에 대한 슬픔을 접어둬야 하는 게, 어제 갑자기 이모한테 연락이 왔었다. 내일 우리집에서 하루 잘 수 있냐는. 마치 시트콤같다고 생각했다. 멀쩡하게 회사를 다닐 때는 식구 중 누구도 온 적이 없는데 백수가 되고 심지어 백수를 선포할 타이밍을 한번 놓치기까지 한 상황에서 이모가 온다니 말이다. 퇴근하고 이모를 맞이하는 척, 그리고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척 완벽한 연기를 할 수 있을까. 광주에서도 비슷한 연기를 한번 했으니 괜찮을 듯 싶었다.
벌써 서울에 도착했다는 이모가 내 퇴근 시간까지 혼자 기다리게 둘 순 없으니, 반차를 썼다 말하고 조금 일찍 만나기로 했다. 좋아 자연스러웠어.
4. 여름 날의 영풍문고
약속 시간까지 한 시간 반 정도 남았다. 그 사이 며칠 전 주문했던 오롤리데이 플래너가 도착했다. 깔끔하니 참 예쁘다. 육 개월 간의 백수라이프를 알차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굳어졌다. 일정 등을 표시하려면 마스킹 테이프가 있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약속 시간까지 남은 애매한 시간은 마리오 아울렛에서 보내기로 한다. 마리오 아울렛에는 다이소도 있고 영풍문고도 있다.
빠르게 마스킹 테이프를 사고 영풍문고로 이동했다. 전에 들렸을 때 본 영풍문고 바깥쪽에 마련된 자리들이 떠올랐고 잠시 그곳에서 쉬어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어라, 빈 자리가 없다. 평일인데도 사람으로 북적북적했다. 천천히 둘러보니 가족 단위의 손님과 어린이 손님이 많았다. 다들 더워서 여기로 왔나 보구나. 시원하고 책이 있는 곳으로. 게다가 공짜. 그 순간 이곳이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좋은 피서지인지를 깨달았다.
책읽는 사람들을 보면 '산 책을 갖고 와서 읽는 거겠지?'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서점 직원도 아닌데 괜히 조바심이 난다. 사람 손을 탄 책은 금방 티가 나고, 잘 안 팔리게 될 것이 걱정되었다.
어쨌든 책이 있는 곳에 사람이 많은 건 참 보기 좋은 풍경이다. 그나저나 영풍문고 참 괜찮은 피서지 같아. 나도 영풍문고에 출근 도장을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두둥실 떠올랐다.
5. Happy Birthday Harry
제일 중요한 이벤트. 오늘은 해리포터 생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