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D+22
*먹은 것
아침: 오미자주스, 식빵(무화과잼+땅콩버터)
점심: 끓인 누룽지, 김치볶음, 베리베리 치즈케이크 피자 2조각
간식: 한입맘모스, G7커피
저녁: 밥, 돈까스, 오이장아찌
**간 곳
이몸이만든빵
바삭마차
망원시장
보건소
운동
***2018년 8월 17일 금요일
1. 말복매직
말복 이후 바람의 온도가 달라졌다. 이십 몇 일 지속되던 무더위도 조금씩 물러갈 준비를 하나 보다. 다만 여기저기서 '오늘 참 시원하다'라고 했는데 난 시원함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평소에 두세 번 정도 가동하는 에어컨을 다섯 번이나 껐다 켰다. 그래도 무더위 특유의 찐득함이나 후덥지근함은 사라져서 좋다. 얼른 제대로 된 말복매직을 느끼고 싶다.
2. 국민 체력 100 체력 평가
다음 주부터 체육교실에 다니는데 그 전에 체력 평가를 받으러 오라 해서 들렸다. 오라고 하니까 간 거고, 체력 평가를 건강 검진 쯤으로 생각해서 그냥 내 몸을 위한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설마 여기서 꾸지람(?)을 들을 줄은 몰랐다. 아, 물론 사유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
"이거 대충 하신 거죠?"
체력 측정 결과를 본 담당 직원이 물었다. 딱히 대충한 건 아니지만 열심히 안 한 것처럼 보이기 싫어서 강하게 부정했다.
"아니요! 완전 열심히 한 건데요!"
내 대답에 직원 표정이 일그러졌다.
"네? 열심히 한 게 이 정도면.."
너무나 저질 체력인 게 문제였다. 알고 보니 내 체력 평가 결과가 3등급에도 미치지 못했다. 참고로 1등급은 매우 건강하고 좋은 상태, 2등급이 평균, 3등급은 못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 정말 최소한의 커트라인-라고 한다. 즉 나는 최소한의 커트라인도 넘지 못 한 것이다. 그래도 여행 가면 빨빨거리면서 잘 돌아다니고, 평소에도 잘 먹고 잘 자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내가 대한민국 평균 이하라니.
"기본적으로 운동에 흥미가 없으신 것 같아요. 운동하면서 카타르시스 같은 거 느껴보신 적 없죠?"
엉뚱하게도 이때 속으로 '오 카타르시스 멋진 말이다' 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든 직원 말이 맞다. 시간이 나면 운동복을 입고 안양천에 가긴 하는데, 나 편할대로 뛰었다가 걸었다가 하면서 1시간을 슬슬 채우고 들어오는 식이다보니 제대로 된 운동인지 잘 모르겠다. 이 바쁜 사회에서 다들 어떻게 시간을 쪼개서 운동을 하는 건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 빼고 다른 사람들은 다 매일매일 운동을 하는 건가? 모두 카타르시스를 느껴본 적이 있는 건가요?
3. 한국 소설을 읽고 울어본 게 오랜만이라서
저녁 운동 나가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다. 배를 깔고 누워 전자도서관에 빌려둔 <현남 오빠에게>를 읽는데 읽을수록 기분이 이상했다. 아까 지하철에서 잠깐 읽었을 때도 이런 기분이라 오래 읽지 못했었다. 어떤 주제로 모인 글들인지 알고 있긴 했지만 활자 하나하나가 이렇게 와닿을 줄은 몰랐다. 이를 악물고 그렇게 읽어내리는데, 순간 어느 지점에서 눈물이 팡 하고 터졌다.
─그때 화장실에서 아이가 소리를 질렀다. 엄마! 엄마, 엄마!
딸아이는 검붉은 얼룩이 묻은 팬티를 벗어 든 채 울먹이고 있었다. 초경이었다.
두 다리를 어정쩡하게 벌린 채 서 있는 아이를 일단 다시 변기에 앉히고, 허벅지 안쪽에 묻은 핏자국을 닦아주었다. 벌벌 떨던 딸아이가 그예 울음을 터뜨렸다. 다 배운 건데, 다 아는 건데도 무섭다고 말하는 딸아이가 측은했다. 나는 딸아이를 깊게 안았다.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자니, 아들아이가 만난 여자애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도 생리를 할 텐데, 걔들도 처음엔 무섭고 떨렸겠지. 누군가 그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괜찮다고, 너희 잘못이 아니라고 말해주었으면.
"엄마, 엄마도 울어? 왜 울어. 나 안 울게. 울지 마."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영문을 모른 채 내 등을 쓰다듬던 딸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는 생리대를 혼자 붙여보겠다고 끙끙댔다. 그렇게 어린애였다.
남편과 아들아이는 어쩔 줄 모르고 식은 음식 앞에서 아내와 딸을, 엄마와 여동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제 손으로 처음 생리대를 한 딸아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어기적거리며 걷는 걸 보니, 나는 누구에게든 마음껏 미안하다고 고백하고 싶었다. 지예야, 수민아, 가영아, 혜빈아, 소영아…… 나는 쪽지에 적혀 있던 이름들을 가만히 불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딸아이와 나의 생리주기가 같을 모양이었다.
김이설, <경년更年> 중
누구든 이 글을 읽고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4. 네이버 비공개 카페 운영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어린아이를 데리고 여행 다녀오는 걸 부질없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어렸을 때 일은 기억 못한다는 게 그 이유다. 그러나 기억하지 못하는 건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여행이든 5년만 지나면 아이도 어른도 잊어버린다. 기록하지 않으면 기억도 사라져버리니 가능한 많은 흔적을 남기라는, 얼마 전 취업특강에서 들은 내용이었다.
어젯밤 불현듯 이 이야기가 생각났고 바로 노트북을 켜서 네이버 카페를 만들었다. 회원은 나, 엄마, 동생 세 명뿐인 우리 가족 카페. 평소라면 카페 대문을 어떻게 꾸밀지, 게시판명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느라 시간을 보냈을텐데 어차피 우리 가족들만 본다고 생각하니 더 빠르고 심플하게 카페의 모양새를 차릴 수 있었다. 카페를 만들자마자 엄마를 초대했고 자정 넘어서까지 신나게 가족 사진들을 올렸다. 가족 모임이나 명절 때 핸드폰으로 찍고 잊혀지던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작년 사진 속에 살아있는 할아버지 얼굴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카페 만들기를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차곡차곡 잘 정리해서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는 보석상자로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