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D+19
*먹은 것
아침: 초코칩 스콘, 오늘의커피
점심: 대게 요리
저녁: 엄마표 비빔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간 곳
스타벅스
대게수산
스타벅스(2회차)
***2018년 8월 14일 화요일
1. 게으름에 대한 조금의 사족
우리 광주집에는 에어컨이 없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다보니 아예 움직이지 않고 녹아내린 찹쌀떡마냥 방바닥에 찰싹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게 된다. 장소가 집이니까 다른 사람 눈치 볼 것 없이 더 격렬하게 게으름을 부린다. 이러한 집의 요소들 때문에 집에서는 뭔가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아침에 정신 차리고 일어나서 스타벅스 간 게 참 뿌듯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글도 쓰고 따뜻한 커피도 한잔 마셨다. 광주집에 내려와서도 나태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한 내 자신이 좋았다.
2. 드디어 선포
이번 광주행의 또다른 목적은 바로 백수 선포.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전 일기들에서도 쭉 적었지만 벌써 백수가 된 지 열 아홉 째 날인데 아직도 집안 사람들한테 말하지 못했다. 주변 사람에게 이게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이렇게 시간을 끄냐는 핀잔도 들었지만 나에게는 처음 발생한 이벤트라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별 거 아닌 것 같은데 생각보다 어렵다.
이러다가는 또 타이밍을 놓칠 것 같아서 늦은 오후께쯤 엄마를 잡아끌고 스타벅스로 갔다. 더운 우리집에서 말했다가 엄마가 더 열받을까봐(?) 우선 시원한 곳으로 장소를 세팅해두는 센스를 발휘했다. 그런데 엄마랑 카페 가는 건 역시 재미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평범한 수다만 떨었을 뿐인데 한 시간이 금방 갔다.
적당한 타이밍을 봐서 드디어 내가 백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 내가 어떻게 이렇게 긴 휴가를 받고 내려왔을까?" 라는 대사로 운을 띄웠다. 설마하는 표정의 엄마에게 그 설마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어떤 상황이었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이러하고 내 재정상태는 저러하다, 당분간은 좀 놀고 싶다 등. 엄마의 반응은 생각보다 담담했다. 조금은 연기같기도 했다.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 보다 훨씬 더 많이 걱정되고, 불안해하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그래도 이 이상 뭔가를 캐묻거나 계속 한숨을 쉬는 등 상상했던 리액션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 엄마한테 여행다니자고 했구나!" 라는 등 그동안의 복선을 하나씩 짚으며 눈을 흘길 뿐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패키지 여행이나 다녀오자는 말을 해줘서 기뻤다. 미안하면서 고마웠다.
3. 반드시 서울이어야 하는 이유
말하고 나면 편해질 줄 알았다. 지금 시간은 내 삶에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깜짝 선물 같은 순간이라고 받아들이고 있기에 '백수 상태'라는 것에 주눅들거나 소심해질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막상 엄마에게 말하고 난 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다른 부분에서 동요가 일었다.
"그럼 서울 올라갈 필요가 없겠네. 월세 아깝게."
엄마의 이 말 한마디에 순간 나도모르게 '그러게' 라는 말이 나올 뻔 했다. 나는 아니라고, 그래도 서울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저것 수업도 듣고, 돌아다니고, 직장인 체육교실도 다녀야하고- 등의 이유를 더듬더듬 붙였다. 내가 말하면서도 어쩐지 자신감이 없었다.
그런데 정말 나는 왜 다시 서울로 가는 걸까. 직장도 없고 본가는 광주에, 이 상태라면 서울에서 월세만 낭비하는 꼴인데 무엇 때문에 서울로 가서 있어야 하는 걸까. 분명 백수인 걸 말하지 못 한 열 아홉 번의 날들도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긴 했지만 그게 서울행에 정당함을 부여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서울이라는 장소가 주는 가치에 대해 당분간은 많은 고민이 필요할 것 같다. 열심히 사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이루어 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