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기 D+14
*먹은 것
아침: 사과+케일, 식빵(토마토잼+땅콩버터)
점심: 에비동
간식: 인덱스 시즈널 아이스커피
저녁: 소세지, 국물 떡볶이, 플레인 토스트
**간 곳
혼돈부리
청년희망재단 취업특강
인덱스
관객의취향
***2018년 8월 9일 목요일
1. 팔 월 둘째 주 목요일
나에게만은 중요한 날이었다. 아빠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아빠한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냈는지 돌아본다. 안타깝게도 자랑스럽게 내세울 만한 하루는 아니었던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그럴 듯한 하루였는지 몰라도 속마음의 때가 좀 많았다. 사실 어제오늘이 그랬다.
2.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오후에 취업특강을 다녀왔다. 떳떳한 백수생활을 갖기 위해 신청한 일종의 면죄부같은 시간이다. 나 취업할 생각이 아예 없는 건 아니고 관심분야는 드문드문 들춰볼 예정이니 조금만 더 놀게요? 라는 자문자답에 합법성을 만들기 위한 속셈.
특강이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녹록치 않은 현실을 인지하고 취업 시 지켜야 할 기본사항에 대해 다시한번 숙지할 수 있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중간중간 '아' 하고 깨달음을 주는 내용들도 있었으니 어느 정도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특강 시간이 끝난 후에도 마지막까지 남아 질문을 드리고 답변을 받았다.
솔직히 반쯤 설렁설렁한 마음으로 왔다. 한때 내가 꿈으로 생각한 일이니까 의리 차원에서 들으러 온 거지 엄청 절실하거나 급한 건 아니라는 자기합리화를 내걸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일'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때의 파동은 생각보다 크게 일었다. 많은 걸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 진심을 다해 일했던 순간들. 그런 걸 떠올리다보니 슬퍼서 마음이 벅차올랐다.
누군가가 나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린다. 아직 살아있니? 하면서.
3.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일층 로비로 내려와 방문자 출입증을 반납했다. 바깥 가로수길 나무가 휘어질 듯 바람이 불어댔다. 아침 뉴스에서 100mm 정도의 소나기가 내린다고 했는데 집에서 나설 때의 날씨만 보고 막연히 맑을 거라며 일기예보를 무시했었다. 멍하니 퍼붓는 비를 보다가, 수첩을 꺼내 취업특강 때 메모한 내용을 다시 한번 읽었다.
소나기가 잠잠해진 틈을 타 얼른 움직였다. 좀 걷다가 나온 횡단보도 건너편에 커다란 캐리어 두 대를 세워둔 모녀가 있었다. 점점 개어 가는 하늘 밑에서 큰 지도를 펼치고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모습이 관광객인 듯 했다. 가까이 다가가니 도움을 요청하는 표정으로 지도를 보이며 더듬더듬 영어를 사용하는데 자세히 보니 지도가 일본어다. 얼른 일본 분이시냐고 일본어로 말을 걸었더니 맞다고 대답했다. 네이버 지도로 목적지인 호텔 장소를 확인한 후 지하철 몇번 출구쪽으로 가면 된다고 알려드렸다. 그 분들은 몇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일본인이냐고 여쭈었을 때 그 분들의 얼굴에서 불안함이 사라지고 안도의 눈빛으로 바뀌던 찰나의 순간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네 일본인 맞아요. 길도 잃어버린 것 같고 물어볼 만한 사람도 없고 날씨도 더워 힘들었는데 일본어를 할 줄 사람을 만나 너무너무 다행이에요. 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표정이었다. 나야말로 그 분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 다행이었다. 아무리 사소해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된다는 건 뿌듯하다. 행복하다. 희열을 느낀다.
4. 아끼고 싶은 성질
남은 하루의 코스는 인덱스 그리고 관객의취향. 좋아하는 장소들을 방문했으니 좋긴 하지만 인덱스는 엊그제도 왔고 관객의취향은 내일도 갈 예정이다. 너무 자주 가서 이곳들이 닳아버릴까봐 걱정이다.
개그맨 김준현은 라면을 끓여 먹을 때 절대 한 봉지를 넘기지 않는 철칙이 있는데, 한번에 라면을 많이 먹으면 질려서 다음 번에 라면 먹고 싶은 욕구가 덜할 것 같아서라고 한다. 너무 좋아해서 불같이 사랑하지만 너무 진도가 빠르면 언젠가는 멀어질까봐 적당한 밀당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고, 이런 관계를 지속해야 평생 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인덱스나 관객의취향은 내게 있어 김준현의 라면 한 봉지같은 존재다. 조금씩 오래오래 이어가고 싶은 곳.
관객의취향에서 영화 <인 디 에어>를 감상했다.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삶의 모습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고, 그 중 내가 선택하고 싶은 삶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영화였다. 사장님의 간결하지만 확 와닿는 영화 설명에 이끌려 보게 되었는데 역시 관객의취향에서 실망이란 느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백수가 된 후 봐서 더 좋았다.
5. 십 사일 째의 자기반성
이틀 간 집에 손님이 방문하면서 일상 패턴이 다소 흐트러졌다. 게으름도 부리고, 늦잠도 잤다. 규칙성을 사랑하지만 가끔은 이런 인간미 흐르는 일탈도 괜찮은 것 같다. 손님이 떠나면 다시 마음을 다잡고 정상 궤도를 찾아야지. 아빠에게 부끄러움없이 살아가도록 해야지.